무모한 국제적 신용창조는 1차 오일쇼크와 함꼐 1973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오일달러들의 순환은 산유국에서 출발한 후 뉴욕은행을 경유하여 남미와 동유럽으로까지 확대되어 포스트 브레튼 우즈 시대의 첫번째 팽창 붕괴 위기를 촉발했습니다. 유가의 3배 상승은 대부분의 석유 수입국가들에게 많은 무역적자를 가져왔습니다. 금보다도 채무증서로서 이러한 적자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비록 몇 년간에 걸쳐 두 자리 숫자의 인플레이션 비용을 치렀지만, 이러한 혹독한 조정 과정을 완화시켰습니다. 19080년대 초반부터 미국은 연간 1,000억 달러를 초과하는 경상 수지 적자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이들 적자는 세계 경제 불균형의 주요인으로 오일쇼크를 대신해 왔습니다.
브레튼 우즈 시스템 또는 이와 유사한 금을 기반으로 한 통화 체제가 남아 있었다면 세계 경제의 전개는 매우 달라졌을 것입니다.무엇 보다도 석유 수입국은 오일 대금을 금으로 지불함에 따라 신용이 축소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오일쇼크 이후에 나타난 경기침체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1908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금의 유출에 의해 경기침체를 유발했고,금이 바닥나기까지는 몇 년 이상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전적인 금본위 제도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이들 후계자인 브레튼 우즈 시스템이 붕괴되었을때, 어떻게 세계 경제가 신용으로 넘쳐흐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금본위제도의 운용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금은 오랜 시간 중요한 가치의 저장수단과 상업적 교환수단으로 선호되었습니다. 고전적 금본위제도는 나폴레옹 전쟁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했고 1875년까지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전세계 주요 무역국가들의 통화는 일정량의 금에 대해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이것은 이들 국가 간의 통화 사이에 고정 환율을 형성했습니다.
금화는 매일 교환의 수단으로 상용되어 유통되었습니다. 상업은행은 예금으로서 금을 받아들였고 이를 다시 대출했습니다. 이들 은행들은 초기에 예치된 금의 양보다 더 많이 대출하여 신용을 창조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출에 대한 예금자들의 요구를 총족시키기 위해서 항상 수중에 충분한 금을 보유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은행들은 예금자들의 상환요구에 응할 수 없는 지급불능의 위험 때문에 과다한 양의 준비금을 감히 대출하지 못했습니다.
금본위재도는 자동조정기능으로 작동되는 과정을 통해서 국가들의 무역수주 불균형을 막았습니다. 무역흑자를 경험하는 국가들은 수출로부터의 금 수취가 수입에 대한 금 기급을 조과했기 때문에 더 많은금을 축적했습니다. 더많은 금이 흑자국의 상업은행에 예치됨에 따라 이들 국가의 은행 시스템은 더많은 신용을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확대되는 신용은 경제 호황을 부추긴 다음에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습니다.
다음편에 이어서 게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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